'레드 컴플렉스'를 넘어 '민주 컴플렉스'로
'레드 컴플렉스', 설명할 것도 없이 이젠 진부해진 말이죠.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이 용어도 폐기처분되었거니 생각했는데, 그건 오판이었나 봅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한참이 흐른 지금 아직도 서슬퍼렇게 살아움직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실 그 용어가 죽었던 게 아니라, 죽은 척 관 속에 들어가 있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자 다시 관 밖으로 뛰쳐나온 흡혈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흡혈귀는 빨간 피만 보면 이성을 잃는데 반해 살아 돌아온 레드 컴플렉스는 빨강 뿐만 아니라, 자기 맘에 들지 않는 모든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빨강에 흥분하는 것은 기본이고 노랑색만 보여도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게다가, 자기 성미에 맞지 않는다 싶을 땐 배후에 빨강이 있느니 뭐니 하면서 정신줄을 놓곤 하죠. 이렇듯 변종 레드 컴플렉스를 보고 있자니 이 녀석도 어쩌면 신종 플루에 감염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게 생각되는 건, 신종 플루가 좀 더 확산되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면 이 녀석은 아마도 배후에 빨강이 있을 거라며 입에 거품을 물 것 같은, 다소 엽기적인 상상이 슬그머니 피어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증이죠.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퇴치되지 않는 지병.
이렇듯 오랜 지병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고 사는 우리 사회의 극우보수세력이 이제는 레드 컴플렉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컴플렉스에 감염되어 가는 조짐이 보입니다.
어제(8월 27일) 기사 중에 부산의 모 공원에서 아니, 모 버스에서 때아닌 명칭 해프닝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모 우익단체의 압력으로 인해 버스에 표기되는 정거장 이름이 '민주공원'에서 '중앙공원' 또는 '중앙공원관리사무소'로 바뀐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주'라는 용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이를 '중앙'으로 바꿔달라는 우익단체의 압력이 성과를 일궈낸 것인데요, 명칭을 바꾼 이유를 설명하는 버스정책 담당자의 답변이 재미있습니다. 이유인 즉, 정거장에서 멀리 떨어진 민주공원보다는 중앙공원관리사무소가 더 가까이 있는 관계로 정거장 명칭을 그것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을 명칭으로 삼고 싶다면 관리사무소보다는 차라리 '공원입구'가 더 낫지 않을까요? 무슨 '공원' 또는 '공원입구'라는 정거장 이름은 들어봤어도 '공원관리사무소'라는 정거장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서울공원'이 아니라, '서울공원 매표소'가 정거장 명칭이 되어야 하겠네요. 참으로 생뚱맞기 그지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보다 중요한 문제의 본질은 '민주'라는 단어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명칭을 변경하라고 압력을 행사한 보수단체 사람들이 바로 이 '민주'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이죠. 민주라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데, 이 용어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다못해 북한이나 여타 독재국가에서조차 어떡하든 민주라는 용어를 끌어쓰는 마당인데, 그런 단어에 이토록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찌된 영문이냐는 것입니다. 북한같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보니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무조건 거부감이 생기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극우보수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는 현재의 우리나라가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실토하는 건가요? 설마 그건 아니겠죠?
의도야 어찌되었든, 그들의 과민반응을 보고 있자니 컴플렉스 개념이 떠오르는 걸 어찌할 수 없습니다. 빨강색만 보면 흥분하는 '레드 컴플렉스'처럼 민주라는 말만 들으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민주 컴플렉스' 말입니다. 레드 컴플렉스로도 모자라 이젠 민주 컴플렉스에마저 감염되고 있는 것 같은데, 죄 없는 빨강색에 대해 괜히 흥분하는 것도 그렇고, 멀쩡한 민주에 대해 괜스레 트집이나 잡는 것도 그렇고,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촛불 들고 거리로 나서면 배후에 '빨강'이 있다며 윽박지르는 것을 넘어 앞으로는 그 배후에 '민주'가 있다며 설레발하는 희극을 목격하게 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레드 컴플렉스를 넘어 민주 컴플렉스로 진화해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과연 웃어야 할까요, 화를 내야 할까요?